천개의 파랑(천선란) - AI에게 배우는 쉼

'천개의 파랑'은 SF소설이다. 하지만 여느 SF소설과는 결이다른 것 같았다. 빠르게 진보하는 기술 진보 속에서 작가는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한다. 천개의 파랑이라는 제목에 이끌려서 읽어본 책이다. 

천개의 파랑 책표지


줄거리

 기술적 결함에 의해서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휴머노이드 콜리는 기수이다. 하지만 실수로 인해 낙마하는 사고를 당하게 되어 폐기처분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이 짝꿍 말이었던 투데이 역시 안락사 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 휴머노이드에 관심이 많았던 연재는 우연히 콜리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콜리를 집에 데리고 와서 수리를 시작한다. 콜리가 집으로 오면서부터 연재의 집에는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연재에게는 장애를 가진 동생 은혜가 있었고, 일찍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그 시간에 머물며 살고 있는 엄마 보경이 가족으로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들춰내지 않는 선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콜리가 오면서부터 보경, 은혜 그리고 연재는 콜리를 통해 서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서 서로에게 감추어졌었던 감정을 알게 되고 서로를 위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콜리의 사정을 듣게된 연재와 은혜는 투데이를 안락사 시키지 않고 다시 뛰게할 방법을 찾는다.

그 방법은 투데이가 다시 뛸수 있는 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서로 머리를 모아 이것이 가능하도록 작전을 짜고 드디어 투데이와 콜리가 다시 경주를 하는 날이 다가온다. 다시 뛰기 시작한 투데이와 콜리. 하지만 콜리는 더 나은 행복의 길을 선택한다. 

밑줄들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누군가는 내 존재 이유며 최대의 장점이라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 말은 틀렸다고 본다. 내가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렇게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내 최후도 맞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내가 추론해낸 바를 말하자면, 고통은 생명체만이 지닌 최고의 방어 프로그램이다. 고통이 인간을 살게 했고,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켰다. 내가 이것을 깨닫게 된 이유는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것으로 나뉜다. 내가 떨어지는 동안 이 이야기를 전부 다 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최후까지 아주 길게 늘어진 시간이 있으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지음 > 중에서

연재도 실은 머지않아 베티가 이 편의점에도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 베티는 2004년에 K대학교에서 만들었던 한국 최초의 이족보행 인간형 로봇 ‘휴보’의 진화형 모델이자 보급형 모델이었다. 외형은 비슷했으나 기능이 더 추가되었고 움직임이 인간의 관절처럼 부드러웠다. 결국 이 세상은 수지타산이 얼마만큼 맞느냐로 돌아가는 것인데, 점장의 말마따나 이제는 인간 한 명을 고용해 쓰는 것보다 휴머노이드 한 대의 비용이 더 저렴했다. 만일 편의점을 찾는 사람들이 베티를 불편하게 생각했다면 베티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내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베티는 편의점을 찾는 무례한 손님들, 이를테면 다짜고짜 ‘담배’만 외치는 아저씨들을 보고도 기분 상하지 않았으며 저장장치의 기록에서 이 손님이 매일 사 갔던 담배를 찾아내 알아서 계산대에 올렸고, 라면을 먹은 후 치우고 가지 않는 손님을 보고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테이블을 정리했으니 어느 면에서 보나 베티가 더 편리했다. -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지음 > 중에서

모친은 인생의 2막이란 원래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보경이 보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예견된 추락일 뿐이었다. 길거리에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 휴머노이드를 보고도 자신과는 엮이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도태의 씨앗이 된 게 분명했다. 물론 보경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휴머노이드가 만능이라고 하더라도 고철이 연기하는 드라마는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역풍과는 전혀 다른 바람이 불어와 보경을 낭떠러지로 밀었다. -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지음 > 중에서

은혜가 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저상버스였지만 여러모로 ‘얹혀 간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등교를 할 때는 노래도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은혜에게 말을 너무 툭툭 걸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조심해. 그 앞에 뭐 있다. 뒤에 차 온다, 얘…. 그리고 아주 가끔씩 경사진 인도를 내려가는 은혜의 휠체어를 허락도 없이 붙잡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도와준다’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랬다. 그들은 은혜가 놀라든 말든 상관없이 은혜의 휠체어를 훅 밀었다. 손잡이를 잡는 것 뿐인데 은혜는 그럴 때마다 길 가다 팔이 붙잡힌 사람처럼 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사람들은 그걸 선의라고 생각했다. 은혜가 ‘알아요’라고 차갑게 말하거나 대꾸하지 않으면 자신의 선의를 무시한 못된 인간이 된다. 그럼 곧장 인상을 찌푸리거나 대놓고 혀를 차는 경우도 있었다. 웃어야 한다. -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지음 > 중에서

물론 빠른 시일 내에는 아니겠지만 아주 먼 미래에요. 짐승이 이 행성을 포기하게 되는 거요. 이곳에서는 더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한 동물의 유전자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거예요.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좁은 울타리에 갇혀 착취당하는 삶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유전자가 생존의 수단으로 죽음을 택할지도 모르잖아요.” 복희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기술의 발달과 멸망의 속도가 같다. 사람들이 조금만 더, 매일 뉴스에 나오는 새로운 기술과 우리가 맞이할 미래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만, 사라져가고 학대받는 동물들에게 관심을 나눠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지음 > 중에서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어차피 이 주로는 투데이만 달릴 수 있다. 관중석에서 보내는 야유는 중요하지 않다. 투데이가 신경 쓰지 않도록 귓가에 말하고, 또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 저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굳이 들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을 듣고 살 필요 없어요 -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지음 > 중에서

느낀점

 '천개의 파랑'을 읽고 AI 또는 휴머노이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연재의 집에 콜리가 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휴머노이드로 인한 삭막함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함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콜리같은 휴머노이드를 하루 빨리 독거노인들이나 불우한 가정에 보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최근 고독사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서 콜리같은 휴머노이드 보급은 고독사를 많이 줄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책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리고 따뜻했다. 특히 최신 기술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입을 통해 천천히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오히려 휴머노이드를 통해 삶의 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휴머노이드를 통해 느림의 미학을 성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여느 SF소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결국 책에서는 기술의 발전의 궁극적 목적을 잘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작가 스스로도 그런것을 느끼기 시작해서 글을 썼다고 했다.

바쁘지만 무기력한 날들이 많았다. 쉬고 싶었지만 멈췄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일까 봐 멈추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고, 실은 작가노트를 쓰고 있는 지금도 멈추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 뒤처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가끔은 내가 너무 바쁘게 사는 것 같다. 아니,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산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전부 바쁜 사람들뿐이었다. -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지음 > 중에서

그래서일까 오늘날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휴식같은 책이라고 느꼈다. 작가는 지구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제는 동물과 사람 그리고 휴머노이드가 공존한 지구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기술의 발전속에서 쉼과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 책이라 생각한다. 책을 본 후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보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 좋았다. 최근에 뮤지컬로도 창작되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싶기도 하다.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