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한병철) - 넘치는 이야기 사라지는 서사

'서사의 위기'는 '피로사회'로 유명한 한병철 철학자가 집필한 도서이다. '피로사회'를 인상깊게 본 기억이 있어서 다시 읽어보았다. 요즘은 서사가 급증하고 있는데 서사의 위기라고 하는 저자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서사의 위기 책표지

주요내용

 현대사회에서 SNS는 사람들을 연결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SNS의 드넓은 바다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스토리', '피드' 등의 이름으로 쏟아져나오는 이야기들과 소위 팔로우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수많은 관계들. 

하지만 왠일인지 사람들은 수많은 연결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있지만 외로운 이유를 서사의 부재라고 말한다. 이것을 가리켜 '서사의 위기'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연결된 매체를 통해 안부와 수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그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무심하게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중요하지 않은 정보로 둔갑해 버린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소통은 연결이 아닌 소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연결되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웹툰이나 이슈들을 소비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연결은 연결이라고 착가하는 것일 뿐 연결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낀다. 

넘쳐나는 비연결 정보는 나를 채우지 못한다. 공감과 연결이 아닌 필요한 정보마을 얻는 무의미한 커뮤니티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자신의 역사성은 사라져 가고 우연성에 의지한 채 정보의 바다를 표류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현상의 해결책으로 '경청', '접촉'을 제시한다. 그리고 서사있는 삶을 제시한다. 단순 정보 나열식의 삶이 아닌 진짜 자신의 서사를 기록하고 자신의 역사가 있는 서사적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밑줄들

정보 과잉 사회는 그 속에서 ‘스토리텔링’을 외친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찰나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공유하고 공감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그 안에 의미는 없다. 사라져 버릴 정보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끝없이 공유하고 타인과 교류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셀링Storyselling’이라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무기가 되어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 세상으로부터 충격받고 저항하고 간극을 느끼며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올릴 기회를 빼앗고 그저 ‘좋아요’를 외치게 만든다. - <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 최지수 옮김 > 중에서

하지만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몰락시킨 것은 소설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한 정보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서사적 형식에 영향을 미친 적이 결코 없었던 메시지의 형식이, 언론이 시민계급에 대한 숙달된 지배를 가능케 하는 주요 도구가 된 고도 자본주의하에서 시민계급에 대한 완전한 지배수단으로 부상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 일을 정보가 수행한다. 정보는 이야기와 다르면서도 소설보다 훨씬 위협적이라는 점이 드러났다...(중략)... 이 새로운 메시지의 형식이 바로 정보다.” - <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 최지수 옮김 > 중에서

오늘날의 정보 쓰나미는 우리를 최신성에 도취된 상태로 추락시킴으로써 서사의 위기를 악화시킨다. 정보는 시간을 잘게 토막 낸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여기에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다. ‘업데이트 강박’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에 유효하지 않고, 미래는 최신의 것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그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서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 <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 최지수 옮김 > 중에서

셀카도 찰나의 사진이다. 셀카는 오로지 순간만을 드러낸다. 기억 매체로서의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일시적 시각 정보다.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짧은 인식 후 영원히 사라진다. 이들은 기억을 위해서가 아닌, 소통을 위해 사용된다. 궁극적으로 운명과 역사가 담긴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 - <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 최지수 옮김 > 중에서

실제로는 자기 묘사에 다름이 없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있다.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주목을 두고 벌이는 경쟁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 시대에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서사의 위기다. - <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 최지수 옮김 > 중에서

스토리텔링은 최근 매우 인기다. 인기가 너무 많으니 마치 우리가 다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의 귀환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도구화하고 상업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많은 경우 조작적 목표를 추구하는 효과적인 소통 기술로 자리 잡고 있다 - <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 최지수 옮김 > 중에서
 

느낀점

 '서사의 위기'는 이야기의 본래적 의미를 잃어가는 현시대에 대한 위기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글쓰는 것이 예전만큼 어렵지 않다.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등록하고 수많은 사람이 읽게 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는 수많은 사람들과 친구 관계를 맺게 해주었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이후 이러한 네트워크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그런데 왜 외로울까? 우울증이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책에서는 진실되지 않은 정보성 글이 넘쳐나서 진정한 서사가 사라지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이를 '서사의 위기'라고 명명한다. 저자는 네트워크상에서 넘쳐나는 이야기는 서사가 아닌 소비위주의 광고와 다를바 없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자신을 광고하는데 이야기를 사용한다. 수익을 위해 블로그를 하고 제품을 팔기위해 이야기식 영상을 찍어댄다. 이야기는 넘쳐나는데 정작 그 안에 따뜻한 온기는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겠지만 어쨌튼 저자는 책을 통해서 연결을 위한 진짜 서사가 필요한 시기임을 지적하고 있다. 어느정도 저자의 말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최근 어떤 프로그램에서 한 연예인이 읽은 고전소설이 화제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한 패널이 고전을 읽으면 폼이난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읽는 것조차 남에게 보이기위한 폼이 필요한 시대인것이다. 뿐만 아니라 '있어보이기'위해 독서행위를 하는 모습은 조금은 낯선 모습이라 느껴졌었다. 

이러한 현상이 진정한 연결가 서사가 사라진 시대에 나타나는 자기과시의 효과라고 책에서는 말하는 듯 하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저자가 지적한 이유중에 하나인 것 같아 약간은 찔린다. 여하튼 이야기에 대해 다시한 번 생각하게 해준 좋은 책이다.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animal narrans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 <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 최지수 옮김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