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밑줄들
우리는 뻘쭘하게 앉아 자기소개를 하고, 별 재미없는 보드게임을 하면서 어른들의 시간이 끝나기만 기다렸다.어른들은 아이들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친구랑 뭘 하며 놀 거니? 다른 집에 놀러갈 때면 그는 그렇게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해가 잘 안 됐다...(중략)....
나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말하면 자기 교육 방식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였다 - < 작별 인사, 김영하 > 중에서
괴로운 후회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차분한 마음으로 그날의 일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오히려 나는 그 사건 직전까지 누렸던 평화로운 날들을 더 많이 떠올리게 되었다.무료하고 갑갑하다고만 여겼던 평온한 시간들이 실은 큰 축복이었다. 물론 당시의 나는 언제나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어했고, 충족되지 않는 그 욕구를 의식할 때마다, 그렇다,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를 유예당하거나 박탈당한 느낌이 - < 작별 인사, 김영하 > 중에서
마음은 어떨까요?
선이가 조금 다급하게 물었다.
“마음이라. 마음이 뭘 말하는지를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기억일까요, 어떤 데이터 뭉치일까요? 또는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감정의 집합일까요?아니면 인간의 뇌나 그것을 닮은 연산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어지러운 환상들일까요?” - < 작별 인사, 김영하 > 중에서
어쨌든 달마의 예언대로 오래지 않아 인간의 세상이 완전히 끝나고, 그들이 저지르던 온갖 악행도 사라지자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대기의 기온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산화탄소 발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른바 인간세계가 끝나게 된 것은 SF 영화에서처럼 우리 인공지능들이 인간을 학살하거나 외계 생명체가 숙주로 삼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점점 더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우리 없이는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뇌에 지속적으로 엄청난 쾌락을 제공하였고, 그들은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번거로운 번식의 충동과 압력에서 해방되어 일종의 환각 상태, 가상세계에서 살아갔다. 오래전 중국의 도가에서 꿈꾸었던 삶이 인간에게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멸종해버렸다. - < 작별 인사, 김영하 > 중에서
그러나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모른 채 휴먼매터스 캠퍼스에서 살아가던 그 철이가 아니었다. 그곳을 떠나 많은 것을 보았고,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냈다.여기서 구조되더라도 육신이 없는 텅 빈 의식으로 살아가다가 오래지 않아 기계지능의 일부로 통합될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봄꽃이 피는 것을 보고 벌써 작별을 염려할 때, 다정한 것들이 더이상 오지 않을 날을 떠올릴 때, 내가 기계가 아니라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럴 때 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여기, 현재에 있다. 그렇게 나를 현재로 이끄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 작별 인사, 김영하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