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2024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 강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책으로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세계 3대 문학상 중 두 상을 차지한 세계의 작가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오래전에 읽어본 책이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다시 읽어 보았다.
줄거리
그녀를 식육의 세계로부터 잘라낸 것은 아버지의 잔인함인가, 남편의 잔인함인가, 아니면 자신을 포함한 인간 모두의 잔인함인가. 그녀를 물었다는 이유로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은을 맞은 개에 대한 죄의식은 꿈의 기저에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그녀를 채근하고 두렵게 하고 불편하게 했던 남편에 대한 책망도 꿈속에 섞여든다. 고기조각처럼 둔탁하고 칼조각처럼 반짝거리는 물안감.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야수성을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처벌의 한 형태로 ‘자기파괴’를 선택한다.(pp.231-232)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 쥐었다.
“아버지!”
처형이 외치며 장인의 팔을 잡았다. 장인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한때 성깔이 대단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장인이 누군가에게 손찌검하는 광경을 직접 본 것은 처음 이었다.
“정서방, 영호, 둘이 이쪽으로 와라.”
나는 머뭇거리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뺨에서 피가 비칠 만큼 아내는 세게 맞았다. 그녀는 그제야 평정이 깨진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영혜 팔을 잡아라.”
“예?”
“한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p.49)
남은 것은 열정의 가속기 안에서 어느 한쪽이 파멸에 이를 때까지 뒤섞여 들어가는 일일 뿐이다. 개체들의 일시적인 합일로 말미암아 그들의 경계가 소멸하는 파국의 현장은 관능적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존중해야 할 인력과 척력의 균형감을 삼켜버릴 듯 으르렁대는 앎의 욕망은 보아서는 안될 현장을 훔쳐보는 자의 시점과 결부되어 있고, 그래서....그는 그녀를 알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자신의 욕망이 창조해낸 이미지의 끝을 알고 싶다는 욕말에 완전히 잠겨들었다. 사랑하지 않고 텍스트를 쓸 수 있겠는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가 그/녀를 찍은 사진은 빛과 그늘의 힘만으로 창조되었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모종의 에너지를 뿜어낸다.(p.225)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p.197)
느낀점
평생의 노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뒷모습으로 장인은 탕수육을 아내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가슴 뭉클한 부정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마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pp.48-49)
이 장면을 보면서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간섭과 폭력을 자행하는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곧 이 사회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자수성가한 사람이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간섭과 폭력은 어쩌면 보편성의 다른 얼굴이 아닐까 생각했다.
영혜의 형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예술이라는 조금은 고상(?)한 방식으로 나약해진 영혜를 이용하여 해소한다. 마지막으로 인혜는 유일하게 영혜를 보호했던 인물처럼 보인다.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 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중략..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중략..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저녁 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pp.191-192)
그러나 인혜는 자신이 영혜를 보호했다기 보다는 외면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폭력과 차별을 당하는 영혜를 모른척하며 보호하는 척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책을 보면서 폭력과 차별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은 직접적인 신체의 타격만이 있는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하거나 심지어 폭력적상황을 모른척외면하는 모습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 말하는 듯 했다.
영혜는 어느 날 폭력적 방법을 통해 얻게되는 양식인 육식을 끊음으로서 적어도 폭력을 행할 수 있는 자신을 차단하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영혜도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폭력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타까웠고 긴여운을 남겼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p.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