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 나도 차별주의자일 수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김지혜 교수가 집필한 책으로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에 대해서 쓴 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 생각이 바뀔 수 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차별을 행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주요내용

 요즘들어 '혐오발언', '차별'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만큼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그런것도 있지만 여전히 차별이라는 병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인 김지혜 교수는 현장에서 이와같은 혐오와 차별을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차별에 대해서 말한다. 

특히 자신은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수많은 차별을 자행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고 이들을 일컬어 '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차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나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 기묘한 현상을 따라가보기로 했다.(p.11)

따라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때로는 타인에게 차별감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을 늘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도 이와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본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또는 당사자)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자신은 선량한 시민이라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장애’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에게 나의 잘못을 시인하고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이미 토론회는 끝났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사과를 할 기회는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동시에 나의 마음 한쪽에서는 희한한 생각이 자라고 있었다. ‘그 말이 왜? 뭐가 문제인 거지?’ 문제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고 사소하게 생각하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결정장애라는 말이 왜 문제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p.6)

이런 차별의 문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문제뿐 아니라 이주민, 인종, 남녀노소, 빈부격차 등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책에서는 이런 다양한 상황속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예들을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현재까지에 걸쳐 제시한다. 

이를 통해서 현재 자신이 행하고 있는 차별적 발언이나 행동이 있지 않은가 점검해 볼 수 있게 한다. 결국 차별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늘 자신을 살피고 내가 가진 것을 누리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점을 늘 생각하기를 저자는 요청하고 있다. 

차별

개인평점: 3.5 / 5

'선량한 차별주의'란 제목을 보았을 때 차별주의자가 어떻게 선량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선량한'이란 말이 좋은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선량한 사람이라고 인식하며 산다. 

그렇기 때문에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신을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평소에 무심코 쓰는 말들이 곧 차별주의자들의 언어임을 발견하게 된다. '~~장애'라는 말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차별주의자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가 아무생각없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알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를 특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결혼을 할 수 없는 동성 커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국 국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한국에서 사는 것을 특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사는 자격을 취득해야 하는 외국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발견의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오더라도 자신의 특권을 눈치채지 못하곤 한다.(p.29)

얼마전에 있었던 '장애인이동권'시위에서 우리는 이 장면을 보았다. 평소에는 지하철을 타고다니는 것이 특권인줄 몰랐겠지만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를 보면서 평소 아무렇지 않게 누릴 수 있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되고 이것이 곧 차별임을 알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누구나 누리고 있는 그 작은 권한을 누리기 위해 행하는 시위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사람들도 있다는 점이다. 잠깐의 불편함을 겪은 일 때문에 항상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의 호소를 외면하는 모습이다. 어쩌면 저자는 이러한 점이 일반 시민들의 본 모습임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정말 너무도 화가 나네요. 이젠 국민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만드네? “애 둘 키우는 일반 시민입니다! 혐오자 극우파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고정관념은 무언가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범죄자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극단적인 악인을 상상한다. 실제로 범죄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보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라고 반응하는 것은 자신이 범죄자에 대한 과장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차별도 마찬가지다.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와 같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악랄하고 기괴한 모습을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기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pp59-60)

차별주의자들이라고 해서 비상식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나도 상식적인 모습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과 같이 '차별의 평범성' 역시 우리사회의 모습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과도하게 생각하는 점도 있지 않나 생각한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너무 약자편에서 이야기하다 보니 모든 상황을 차별적 언어로만 표현하고 약자편에서 느끼는 차별에만 초점을 맞추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두 가지 비하성 언어가 담고 있는 사회적 맥락까지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김치녀’는 ‘사치를 부리며 남성에게 피해를 끼치는 존재’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여성이남성에게 보여야 하는 ‘바른’ 행동에서 어긋나있다는 평가를 포함한다. 즉 여성에게 기대되는 행동, 말하자면 조신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이라는 억압적인 역할 규범이 부여된 언어이다 ‘한남충’의 경우, 여성이 남성에게 특정한역할규범을요구하는의미로 읽히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여성의 입장에서 ‘나도 당신을 조롱 할 수 있다’는 호명 권력을 사용하는 현상으로 읽힌다.(p.97)

위에서 말하는 부분은 조금은 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김치녀'라는 의미가 저자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대부분 알 것이다. 둘다 혐오발언이라면 같은 취급을 당해야 하는데 약자들이 듣는 것만이 차별언어라는 것은 좀 납득이 안되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저렇게 표현되는 것은 똑같이 차별언어인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점에서 보면 책이 출판된 시점이 2019년도이니까 그 사이 많이 바뀐 것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저자의 의견들이 대부분 현실속 이야기였겠지만 지금은 달라진 부분도 많고 바뀐 인식들도 많다는 생각을 했다. 개정판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했다.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그 시작은 언어에서부터이다. 내가 편한 언어라 하더라도 남에게 차별감을 느끼게 한다거나 상처를 준다면 다시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구나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것 같다. 좋은 책이다. 

밑줄모음

우리의 생각이 시야에 갇힌다. 억압 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감수한다.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 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지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시야가 미치지 못한 사각지대를 발견할 기회이다 그 성찰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 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차별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p.79)

비하성 표현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때로 사회는 단어를 교체한다. ‘장애자’나 ‘불구’를 ‘장애인’으로, ‘결손가족’을 ‘한부모가족’이나 ‘조손가족’으로, 혼혈인을 ‘다문화가족 자녀’로 순화하는 식이다. 이런 단어의 교체는 그 단어 안에 담긴 무의식적 편견과 낙인을 반성하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단어의 교체로 낙인이 온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장애인', '다문화'등의 용어가 다시 낙인을 담은 비하성 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단어를 바꾸어도 그 대상을 비하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pp.93-94)

불평등한 사회가 주는 삶의 고단함이다.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올라가야 정말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아 만족스러운 상태가 될지도 알 수 없다. 결국 일정 지위에 올라간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는 동기를 가지며 , 이는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학식과 경험이 많으며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데 가장 큰 저항 세력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