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은 메리셸리가 1818년 집필한 최초의 SF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소설이다. 일전에 '가여운 것들'을 읽었을 때 프랑켄슈타인의 여자버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다시 읽어보았다. 어렸을 적 보았던 프랑켄슈타인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
줄거리
북극을 탐험하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월턴은 북극바다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난다. 과학자였던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월턴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방법을 연구한다.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생명체를 창조해 낸다. 하지만 그 생명체의 기괴한 모습에 놀란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생명체를 버리고 도망간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조카의 장례를 치루던 날 모든일의 시작이 자신이 만든 괴물로부터임을 알게 된다. 이윽고 자신의 창조자를 만나게 된 괴물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준다.
괴물은 홀로 남겨진 이후 이곳저곳을 방황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한 가정의 창고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 가정을 몰래 엿보는 동안 괴물은 인간다운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괴물은 가난한 그 가정을 몰래 도우며 자신도 그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을 때 철저하게 버림을 받는다. 이뿐 아니라 사람을 살려주는 일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외모로 인해 오히려 공격을 받고 이것에 분노한 괴물은 생명있는 존재에 복수하겠다 결심한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을 찾아온 괴물은 자신과 똑같은 여성을 만들어 준다면 이 분노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괴물의 말을 들은 프랑켄슈타인은 고심끝에 거절하고 괴물은 분노에 차 프랑켄슈타인의 주변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월턴과 함께 있었던 프랑켄슈타인마저 살해한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월턴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누나에게 편지를 써서 들려준다.
느낀점
최초의 SF소설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켄슈타인의 기억은 어렸을 적 머리에 나사가 박힌 괴물의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었다고 착각하며 지낸 어린시절도 있었다.
최근에 ‘가여운 것들’을 인상깊게 보았는데 ‘가여운 것들’이 여성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다시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우선 재미있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슬펐다. 읽으면서 도대체 이 소설의 피해자는 누구일까? 살해당한 자들일까? 아니면 괴물일까? 물론 둘 다이다. 하지만 원인을 따져보자면 가장 큰 원인은 프랑켄슈타인이며 다음으로는 가난한 펠릭스 가정에서 겪은 참담함, 그리고 여인을 살려주고 공격당하는 상황 등이 결국에는 가장 순진한 괴물을 가장 잔인한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고 느꼈다.
이러한 점은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사회속에서 괴물은 누가 만드는가? 선천적으로 태어나는가? 물론 그럴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그 선천적 본성을 어떻게 이끌어 주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처음 탄생한 괴물은 펠릭의 가정의 행복을보고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배운다.
그렇지만 거부당한다. 외모 때문에 낙인 찍힌다. 결국 복수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지켜본 가정을 자신도 꾸려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을 멈출 생각도 한다. 이마저 거부당하자 진짜 괴물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서 누구도 괴물이 될 수 있고 누구도 괴물을 창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 넘쳐나는 가짜뉴스들과 SNS에서의 마녀사냥들을 보면 1818년 출판된 이 책이 보여준대로 그대로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SF소설답게 최근 이슈화 되고 있는 AI에 대한 예리한 경고를 하는 듯 보였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책임지지 않는다. 이 부분은 작가도 후기에서 밝힌 바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양산되는 수많은 창조물들.
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 소재는 매우 느슨하다. 그렇기 윤리적인 문제와 책임의 문제가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그리고 괴물을 통제할 수 없었던 프랑켄슈타인처럼 점점 기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 많이 발생하는 차량 급발진문제는 이를 잘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겠다.
이미 약 200여년 전에 작가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서 과학의 발전과 그에 따르는 책임의 문제를 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최초의 SF소설이자 과학의 미래에 대한 경고의 책이라 일컬어진다고 보여진다.
역자도 말했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 괴물에게 마음이 가는 소설이었다. 괴물은 어쩌면 내가 될수있고, 너가 될수도 있고 사회속 소외받고 있는 어떤 인물일수도 있고, 심지어는 사회가 양산해 낸 괴물들일 수 있다.
그래서 슬프고 씁쓸했으며 두렵기도 했다.
번역하는 내내 탐험가 월턴보다, 주인공 프랑켄슈타인보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 속 괴물의 목소리가 준 울림이 더 컸고, 한 편의 소설이 제시하는 다채로운 문제와 입장이 흥미로웠다. - < 프랑켄슈타인_현대지성클래식37, 메리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역자후기 중에서
최근에 나오는 그 어떤 SF소설보다도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참 좋은 책이다.
밑줄들
다만, 아직 채워지지 않은 한 가지 결핍이 있어. 그게 없어서 지금은 나 자신이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져. 친구가 하나도 없거든, 누나. 성공을 향한 열정으로 빛날 때 나의 기쁨에 동참해줄 친구, 낙담해서 몹시 괴로울 때 실의에 빠진 나를 지탱해줄 사람이 없어 - < 프랑켄슈타인_현대지성클래식37, 메리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중에서
생명 없는 존재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일념으로 목표를 향해 거의 2년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느라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건강도 잃었습니다. 적절함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열정으로 창조라는 목적 하나만을 바라보았습니다…(중략)… 내가 만든 존재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실험하던 방을 뛰쳐나와 오랫동안 이리저리 침실을 서성였지만, 도저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흥분과 동요가 사라지더니 극도의 무기력함이 찾아들더군요. - < 프랑켄슈타인_현대지성클래식37, 메리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중에서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소.” 악마가 말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흉측한 자들을 미워하니까. 그러니 내가 얼마나 밉겠소. 나는 살아 있는 온갖 것보다 훨씬 더 흉측하니 말이오! 하지만 나를 창조한 당신이 피조물인 나를 혐오하고 거부하는군요.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끊을 수 있는 끈으로 묶여 있는 나를 말이오. 당신은 나를 죽일 작정이군요. 감히 어떻게 생명을 갖고 그렇게 장난을 칠 수 있소? - < 프랑켄슈타인_현대지성클래식37, 메리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중에서
행복을 누려야 마땅한 이 식구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줄 힘이 어쩌면 내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멍청한 괴물!). 잠자거나 헛간을 비울 때도 자애로운 눈먼 아버지, 상냥한 아가타 그리고 뛰어난 청년 펠릭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소. 나는 이들을 우월한 존재로 존경했소. 이들은 미래의 내 운명을 결정할 사람들이었소. 이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이들이 나를 맞아주는 상상을 수천 번은 했다오. 나를 보면 혐오감이 들겠지만, 내 점잖은 태도와 호감을 자아내는 말로 먼저 호의를 얻고 나면 그다음에는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소. - < 프랑켄슈타인_현대지성클래식37, 메리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중에서
인간을 죽음에서 구했는데 보답으로 나는 이제 살과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고통으로 몸부림쳐야 했던 것이오.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호의와 온정이라는 감정은 사라지고 이가 갈리는 지옥 같은 분노만 남았소. 고통에 격분한 나는 인간 전체를 영원히 증오하고 이들에게 복수하기로 맹세했소. 하지만 부상으로 인한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소. 맥박이 멈추고 나는 의식을 잃었소 - < 프랑켄슈타인_현대지성클래식37, 메리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중에서
특히 과학자가 자신의 결과물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 탓에 끔찍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설정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오늘날 컴퓨터 기술, 핵무기, 유전공학 등 새 기술에 수반되는 끊임없는 위협이 19세기 초에 쓰인 이 소설에 이미 원형으로 제시되어 있는 셈이다. - < 프랑켄슈타인_현대지성클래식37, 메리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역자 후기 중에서